개인적으로 심심한 영화의 최고봉은 이윤기 감독의 (2008)라고 생각한다. 1년 만에 불쑥 찾아와 빌려 간 돈을 당장 갚으라는 희주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병훈은 하루 동안 희주와 함께 자신의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십시일반 돈을 꾸어 돈을 갚는다. 한때 사랑했었던, 헐렁하고 물렁하기 그지없는 성격의 병훈을 따라다니고 그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를 향해 한껏 날이 서 있던 희주도 조금씩 마음이 누그러진다. 소극장의 단막극처럼 단출한 장면들을 생동하게 해주는 두 배우의 연기가 돋보이는 가운데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영화 내내
루마니아 출신 작가 에밀 시오랑은 어느 책에서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선고받고 독배를 마시기 직전 플루트를 연주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지금 플루트를 부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는 물음에 소크라테스는 죽기 직전에 이 곡조를 알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죽음 직전을 상상하는 것은 어딘지 고약하게 여겨지지만 적어도 한 사람은 그 순간 플루트를 연주하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고 전하는 이야기 앞에서라면 마음을 조금은 가라앉힐 수 있다. 나아가 그가 하늘을 바라보거나 새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플루트’를 연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놀랍다. 그것은
프랑스의 소설가 미셸 투르니에는 소설 『메테오르』에서 “행복의 힘은 ‘주어진 것’과 ‘이룩한 것’이 적절한 비율을 지녀야 비로소 발휘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신화적 이미지의 글쓰기로 유명한 이 작가의 행복론은 그의 명성과 크게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삶과 죽음, 하늘과 땅, 낮과 밤, 생물과 무생물과 같이 이질적인 양극단의 조화가 세상을 이끌어가듯이, 한 개인의 차원에서도 생의 전면과 이면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주어진 것에 비해 너무 많이 혹은 너무 적게 이룩하는 것은 불행의 원천이 되는 것일까.
부산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서울은 거대한 ‘시내’와 같았다. 지방의 도시에서 외출과 유흥을 위한 시내란 몇 군데로 한정된 데 반해 서울은 마치 도시 전체가 시내인 것처럼 끊임없이 들썩이고 출렁인다. 그러나 매끄럽고 말쑥한 대도시의 용모를 뽐내는 서울일지라도 그 뒷면을 간직하고 있기 마련이다. 전철과 버스가 비집고 들어갈 수 없는, 승용차는 한 방향으로 간신히 드나들고 스쿠터나 두 다리로나 쑥쑥 밀고 들어갈 수 있는 잘고 잘은 골목들. 페인트를 두껍게 칠한 대문에 적벽돌로 쌓아 올린 연립주택들이 즐비하고, 각자의 생활이 뱉어낸 쓰레기
어릴 적 놀이터에서 놀았던 기억을 더듬어보자. 계단을 타고 올라간 뒤 미끄러져 내려오는 게 전부이지만 꼭대기를 성채 삼아 함락 작전을 펼치던 미끄럼틀이 있고, 원심력을 이용해 진자운동을 하는 게 전부이지만 각자 하나씩 차지하고 앉은 두 명의 다리를 꽈배기처럼 꼬아 함께 허공을 달리며 바이킹 놀이를 하던 그네가 있으며, 원숭이처럼 상하좌우로 타고 오르는 게 전부이지만 그 미로 같은 지형을 활용하여 잡기 놀이를 하던 정글짐이 있다. 아이들의 상상력과 협동심, 공동체 의식 등을 자극하고 길러주기 위해 다채롭게 응용하여 놀 수 있게 만들어
자연은 인간 사회의 원료로 전락한 지 오래다.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땅이 파헤쳐지는 것은 예삿일이고 자원의 생산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애초의 자연환경과는 무관하게 효율성만을 고려한 농장과 지대가 대규모로 개간된다. 자원은 분자와 원자 단위까지 낱낱이 활용되고, 지구 반대편에서는 버려질 쓰레기가 지구 이편에서는 상품으로 소비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자연을 가공하여 이루어진 세계를 자연인 양 여기며 살아가는 우리는 태초의 자연을 희구하는가 하면, 그야말로 남획되는 자연의 신음에 귀 기울이려 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상 자연은 만사의
양영희 감독의 영화 (2022)는 감독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어머니 강정희씨는 젊은 시절 제주 4.3 사건의 현장에서 도망쳐 일본에 정착한 뒤, 분단 과정에서 북한 공산당으로 이적하며 당에 의해 아들을 희생당한 기구한 사연을 갖고 있다. 어머니의 복잡한 삶의 행적을 따라 덩달아 상처받아야 했던 감독은 영화라는 매개를 빌려 그런 어머니의 과거를 추적한다. 4.3 사건에 대한 고통으로 남한을 버리고 북한을 택한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는 만큼 사랑하기도 하기에, 감독은 어머니를 사랑하는 만큼 이
재독(在獨) 철학자 한병철은 『사물의 소멸』(김영사 2022)에서 고유의 역사와 주체성을 간직한 타자로서의 사물이 사라져가는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주변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한 사람에 가까운 아우라를 뿜어내는 괘종시계나 가죽구두 따위가 아니라 스마트폰과 같이 언제 어디서나 정보에 연결되도록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텅 빈 객체들이다. 그것들은 도처에 널려 있고,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으며, 언제든지 매끄럽고 ‘스마트’하게 처분 가능한 정보로 모든 것을 환원한다. 세계가 손아귀에 쥐어져 있다는 전능감에 가까운 착각은 역설
얼마 전 들었던 기묘한 이야기 하나. 최근 출판계의 불황은 팬데믹 기간 동안 외국인의 입국이 제한되면서 외국인 노동자 위주로 돌아가던 인쇄소가 하나둘 문을 닫게 되어 벌어진 일이라는 것. 얼마 전 보았던 기묘한 풍경 하나. 택시를 타고 광주 시내를 지나는데 길 한복판 공사장에 안전에 유의하라는 문구가 한국어, 태국어, 아랍어로 적혀 있었던 것. 책이라는 가장 추상적인 상품의 생산라인에 외국인 노동자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도심 한복판에서 상점 간판이 아닌 공사장 현수막에서 외국어와 마주치니 낯설었다. 사무노동은 점점 더
오늘날 홍수처럼 쏟아지는 영상매체와 상업광고는 삶을 무한한 가능성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으로 꾸준히 포장하고 있지만 우리는 삶이 그런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삶은 제아무리 가능해 보이는 것도 돌연 불가능한 것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능할 뿐 아니라 절망과 무력함을 일상으로 체화하도록 영원히 채찍질하는 가혹한 존재이다. 그런 삶을 시로 옮기는 일이란 우리를 집어삼키려는 삶의 동물적인 본능을 긍정하고 풀어놓는 일과도 같다. 김명기 시인의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걷는사람 2022)는 삶을 긍정하기 위해 처연함을 둘러 입
어둡고 음습하지만 짓궂고 천진난만하다. 밤과 어둠, 죽음과 유령, 무한과 추상, 아이와 유머. 함기석의 시세계를 마주하면 떠오르는 것들이다. 세계의 이면에서 벌어지는, 투명하리만치 검은 유희의 난장을 아무런 제어장치도 없이 눈앞에 펼쳐놓는 것이 곧 시라는 듯이. 함기석의 최근 시집 『음시』(문학동네 2022)는 그러한 바탕 위에 세워져 있다. 시인은 양이 아닌 음을 지향하며 세계의 이면, 존재의 밑바닥, 언어와 관념의 기저를 두루 탐색한다. 음을 지향하는 시는 시인의 말처럼 “산 자의 죽은 말과 죽은 자의 죽지 않는 말 사이”를 표
강물의 유속이란 구간에 따라 다르기 마련이다. 상류에서는 급류가 형성되어 쉼 없이 물이 쏟아지는가 하면 하류에서는 마치 흐름이 멈춘 것마냥 유속이 느려진다. 현재라는 시간은 강의 하류처럼 영원히 고여 있을 것만 같은 정체 구간으로 감각된다. 하류에서 보기에 상류는 아득히 멀리 있어 쏟아져 내려오는 물의 속력을 미처 가늠할 수 없는 한편, 바로 옆에 쌓여 있는 모래 둔덕의 황량하게 반짝이는 모습에는 눈길을 빼앗기게 된다. 이병국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내일은 어디쯤인가요』(시인의일요일 2022)는 이처럼 멈춰있는 듯한 현재의 느린 유
사랑은 관계의 가장 추상적인 단계를 의미하고, 종교는 믿음의 가장 추상적인 단계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사랑이 종교가 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아마도 관계에 대한 맹목이 모든 것을 초월하는 상태에 도달함을 의미하리라. 이병철 시인의 시집 『사랑이라는 신을 계속 믿을 수 있게』(걷는사람 2021)를 읽다 보면 사랑에 대한 믿음이 백색에 가깝게 추상화되는 것을 지켜볼 수 있다. 단 한 사람의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 사랑에 대한 시인의 면밀한 시적 탐구는 세속적인 단계의 사랑을 넘어 거대한 스케일의 세계를 끌어안는다. 시는 이 거대한
시가 일상의 건조하고 삭막한 언어와 달리 다채로운 이미지로 구성된 언어라는 사실을 상기할 때 리산 시인의 시집 『메르시, 이대로 계속 머물러주세요』(창비 2017)는 무성한 이국풍의 이미지로 꾸려진 한 권의 테마파크와 같다. 그러나 이 테마파크는 세속의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즐거움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고독과 쓸쓸함을 위한 것에 가깝다. 시인은 지금 여기와 사뭇 다른 시공으로 읽는 이를 훌쩍 데려다놓고는 홀연히 사라져버린다. 그곳에서 독자들은 낡은 회전목마, 녹슨 관람차 따위가 버려진 황량한 풍경을 마주할 것이다.철 지난 그